우리 동네 상가에 빈 점포가 생기면 누가 해결해야 할까요. 지금 한국에서는 건물주와 임차인이 알아서 해결해야 할 민간의 문제로 봅니다. 그런데 파리는 다릅니다. 빈 점포가 생기면 시(市)가 직접 개입합니다.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소진공)은 6월 18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의 상업 활성화 전문기관 'Paris Commerces'를 방문해 파리시의 상가 공실 대응 체계와 생활상권 관리 정책 운영 현황을 살펴보고 국내 적용 방안을 논의했다고 19일 밝혔습니다.
소진공이 왜 파리까지 갔는지, Paris Commerces가 어떤 곳인지, 그리고 한국 상권에 이 모델이 적용될 수 있는지 정리했습니다.
Paris Commerces — 파리시로부터 빈 점포 관리를 위탁받은 기관
Paris Commerces는 상권공동화 지역의 근린상업 유지·발전 임무를 파리시로부터 위탁받아 운영되는 공공기관입니다. 공실 점포를 단순한 유휴 자산이 아닌 도시 상권을 관리하고 재구성하는 정책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이 기관의 가장 큰 특징은 파리시로부터 선매권을 위임받았다는 점입니다. 선매권은 민간 상가가 시장에 매물로 나왔을 때 공공이 먼저 매입할 수 있는 권한입니다. Paris Commerces는 이 권한을 활용해 점포를 사들여 개보수한 후 임대인과 임차인 간 부동산 거래 조율부터 체계적 입점까지 돕습니다.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골목 상권에 좋은 자리가 비었을 때 투기 자본이나 프랜차이즈가 들어와 임대료를 올리기 전에, 시가 먼저 그 공간을 사버립니다. 그리고 지역에 필요한 업종, 소상공인, 창업자에게 적정 임대료로 내줍니다. 젠트리피케이션을 막는 가장 직접적인 수단입니다.
파리 상권의 변화 — 생활밀착형은 늘고, 의류·패션은 줄었다
이날 간담회에서는 파리 상권의 업종 변화와 공실 대응 전략이 집중적으로 논의됐습니다. 파리에서는 식료품점과 의료서비스, 건강·운동 관련 시설, 자전거 판매·수리점 등 생활밀착형 업종이 증가하는 반면 의류·신발·섬유 판매점과 자동차 부품 관련 업종은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파리시는 이러한 변화에 맞춰 공실 점포를 무작정 임대하는 대신 지역에 필요한 업종을 선별적으로 유치하고 생활밀착형 상업 기능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상권정책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공실을 채우는 것'과 '지역에 맞는 업종을 선별해 유치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접근입니다. 전자는 임대료를 낼 수 있는 업종이 들어오면 그만이지만, 후자는 그 동네에 진짜 필요한 가게가 무엇인지를 먼저 묻고 거기에 맞는 입주자를 찾습니다. 이 차이가 상권의 지속가능성을 결정합니다.
한국과 파리의 결정적 차이 — 개인의 문제 vs 공공의 문제
전영준 소진공 정책연구실 부연구위원은 "한국은 상가 공실이나 젠트리피케이션을 소상공인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경향이 강한 반면, 파리는 도시와 지역 공동체의 생존이 걸린 거시적 과제로 보고 공공이 적극 개입하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이 발언이 이번 방문의 핵심을 담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골목 상가 공실은 "건물주가 임대료를 너무 높이 불러서" 또는 "경기가 나빠서 장사가 안 돼서"라는 방식으로 개인 간 문제로 귀결됩니다. 정부나 지자체는 지켜보다가 심각해지면 지원금을 주는 수준입니다.
파리는 이 문제를 도시의 문제, 즉 공공이 책임져야 할 영역으로 정의합니다. 어떤 동네에 어떤 가게가 있어야 하는지는 도시 설계의 문제라는 철학입니다.
인태연 이사장 발언 — "공공의 조정 기능을 강화해야"
인태연 소진공 이사장은 "Paris Commerces는 공실상가를 지역 자산으로 전환해 소상공인 창업과 지방 상권 활성화를 동시에 실현하고 있는 우수 사례"라며 "우리나라도 상권 위기를 개인의 문제로 방치할 것이 아니라, 사회적 문제로 인식하고 이를 조정할 공공의 기능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인 이사장은 취임 100일 기자간담회에서도 같은 맥락의 발언을 했습니다. "국가와 지자체가 상권을 살려놓으면 자본이 들어와 임대료가 급등하는 젠트리피케이션도 큰 고민이다. 프랑스처럼 공공이 빈 점포를 매입해 개발·재임대하면서 가격 상승을 완화하는 모델 등 해외 사례를 참고해 고민하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소진공 이사장이 '공공의 선매권 모델'을 직접 언급했다는 것은, 이번 파리 방문이 단순 시찰이 아니라 실제 정책 반영을 염두에 둔 사전 조사였다는 의미입니다.
소진공의 이번 방문 일정 — 독일에서 파리까지
소진공은 6월 15일 독일 뒤셀도르프를 시작으로 16일 프랑크푸르트, 17~18일 프랑스 파리를 차례로 방문하며 유럽 주요 도시의 해외 판로 확보 방안, 마이스터 제도, 상권정책 고도화 방안, 소공인 및 장인 지원정책, 상인조직의 역할 등을 두루 살펴봤습니다.
파리 방문만 따로 떼어 보면 안 되고, 독일의 마이스터 제도(장인 육성 시스템)와 프랑스의 공실 관리 모델을 함께 벤치마킹하는 패키지입니다. 소상공인을 어떻게 키우고, 그들이 영업할 공간을 어떻게 보호할 것인가를 동시에 살핀 것입니다.
한국에 적용하면 어떤 모습이 될까
선매권 제도 도입이 관건
Paris Commerces 모델의 핵심인 선매권은 한국에서는 아직 없는 개념입니다. 지자체가 특정 상가를 우선 매입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상가임대차보호법 또는 도시재생법 개정이 선행돼야 합니다.
인 이사장이 언급한 환산보증금 기준 조정 문제도 함께 풀어야 합니다. 보호 대상에서 벗어난 고가 상가에서는 임대료를 사실상 마음대로 올릴 수 있는 구조가 남아 있어, 공공이 아무리 좋은 상권을 만들어도 자본이 들어와 임대료를 올려버리면 소상공인은 다시 쫓겨납니다.
실태조사부터 연계
소진공은 이번 방문 결과를 바탕으로 국내 상권 실태조사와 공실 대응 정책, 업종 보전 방안, 창업 입지 상담, 생활상권 재생사업 등을 연계한 상권관리 체계 고도화를 검토할 계획입니다.
당장 선매권 같은 대규모 제도 변화가 어렵더라도, 실태조사와 창업 입지 상담을 연계하는 것은 빠르게 시작할 수 있습니다. 어느 지역에 어떤 업종이 부족한지를 데이터로 파악하고, 창업을 원하는 소상공인에게 그 정보를 제공하는 것만으로도 상권 불균형 해소에 도움이 됩니다.
지금 소상공인에게 의미 있는 이유
이번 파리 방문이 단순한 해외 출장으로 끝날지, 실제 정책 변화로 이어질지는 아직 모릅니다. 그러나 소진공 이사장이 직접 프랑스 모델을 언급하며 "공공의 기능 강화"를 강조하고 있다는 것 자체는 방향의 변화를 시사합니다.
지금 자영업·소상공인 환경은 중동 전쟁 여파 고물가, 금리 인상 압박, 내수 부진이 겹쳐 역대급으로 어렵습니다. 법인 파산 신청이 사상 최대를 향해 가는 상황에서 상권 공실 문제는 더 빠르게 확산되고 있습니다.
공공이 개입해야 할 타이밍이 바로 지금이라는 데 전문가들도 공감하고 있습니다. 파리의 사례가 한국에서 어떻게 번역될지, 앞으로 소진공의 정책 발표를 지켜봐야 합니다.
참고자료
https://www.sedaily.com/article/20057647
https://www.sentv.co.kr/article/view/sentv202606190003
https://www.fnnews.com/news/202606191113470491
https://www.pinpoint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461437
https://news.nate.com/view/20260619n07158
https://www.newspim.com/news/view/20260520000663

